바디 알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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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디 알자만은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 티무르 왕조의 왕자였다. 그는 아버지 후세인 바이카라와의 갈등, 우즈베크족의 침략, 그리고 망명 생활을 겪었다. 1490년대에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고, 이후 우즈베크족의 침략으로 칸다하르로 도주하여 페르시아,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했다. 1514년 이스탄불에서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그는 여러 명의 배우자와 자녀를 두었으며, 복잡한 가계도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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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17년 사망 - 하인리히 이자크
하인리히 이자크는 15세기 후반~16세기 초 플랑드르 악파 작곡가로, 막시밀리안 1세 궁정 작곡가로서 미사, 모테트, 세속 가곡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콘스탄티누스 합창곡》은 그의 대표작이자 독일어권에 네덜란드 다성 음악 양식을 전파하는 데 기여했다. - 1517년 사망 - 김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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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 알자만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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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칭호 | 미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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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 기간 | 1506년 5월 4일 – 1507년 |
전임자 |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 |
계승자 | 국가가 폐지되었지만, 가문은 바부르가 계승 |
배우자 | 우룬 술탄 하눔 카불리 베굼 루카이야 아가 추착 베굼 기타 배우자 1명 |
자녀 | 무함마드 무민 미르자 무함마드 자만 미르자 쿠체크 베굼 |
왕조 | 티무르 왕조 |
아버지 |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 |
어머니 | 베가 술탄 베굼 |
출생 연도 | 1456년 |
사망 연도 | 1514년 |
사망 장소 | 콘스탄티노플 |
페르시아어 이름 |
2. 생애
1490년대에 바디 알자만과 그의 아버지 후세인 바이카라 사이에 갈등이 시작되었다. 후세인은 바디 알자만을 아스타라바드 총독에서 발흐 총독으로 전출시키고, 그의 아들 무함마드 무민을 아스타라바드 후임으로 임명했다. 이에 분노한 바디 알자만은 반란을 일으켰으나 패배했고, 그의 아들은 처형되었다. 1499년, 바디 알자만은 헤라트를 포위하며 아버지와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이후 후세인과 화해했지만, 긴장 관계는 계속되었다.
후세인 바이카라가 살아있을 당시, 바디 알자만은 발흐의 총독을 맡았다.[10] 15세기 말, 북쪽에서 무함마드 샤이바니 칸이 이끄는 우즈베크 (샤이바니 왕조)가 세력을 확장하여 1500년에 사마르칸트, 부하라가 함락되자, 바디 알자만은 아버지로부터 우즈베크 토벌을 명받았다.[11] 1503년 초봄, 바디 알자만은 우즈베크 토벌에 나섰으나, 원군을 받지 못해 발흐로 돌아갔다.[11] 같은 해 샤이바니가 발흐를 공격하자 바디 알자만은 탈출했다.[11] 위기에 처한 바디 알자만은 후세인과 화해하고, 1504년에 무르가브에 병력을 진격시켰다.[12]
1500년 무함마드 샤이바니가 이끄는 우즈베크인 (샤이바니 왕조)이 사마르칸트와 부하라를 함락하자, 바디 알자만은 아버지로부터 우즈베크 토벌을 명받았다.[11] 1503년 초봄, 테르메즈에서 아무다리야 강 우안을 건너 우즈베크 토벌에 나섰으나, 원군 부족으로 발흐로 돌아갔다. 같은 해 샤이바니가 발흐로 진군하자 바디 알자만은 탈출했다.[11] 1504년 무르가브에 병력을 진격시키고, 칸다하르를 공격한 바부르를 견제했으나 군사적 충돌은 없었다.[12]
1505년부터 1506년 사이 겨울, 후세인 바이카라가 샤이바니 공격을 결정하고 티무르 왕조의 모든 왕자에게 참전을 요청했다.[13] 1506년 1월 바디 알자만이 이끄는 연합군 선봉이 무르가브에 도착했으나, 본대를 이끌던 후세인이 위독해져 5월에 사망했다.[14] 후세인 사후, 바디 알자만과 그의 동생 무자파르 후세인의 공동 통치가 결정되었으나[14], 두 군주 사이 및 아미르들 간 권력 다툼이 벌어졌다.[14] 티무르 왕조 군은 샤이바니에게 포위된 발흐로 진군을 계속했으나, 샤이바니와의 결전 없이 해산했다.[15]
1507년 5월, 샤이바니의 호라산 침입 시 반격 준비가 되지 않은 티무르 왕조는 막지 못했다.[16] 헤라트 수비대는 우즈베크 선발대에 격파당했고, 샤이바니 본대가 도착했을 때 왕족과 아미르는 이미 탈출한 상태였다. 바디 알자만은 칸다하르로 도주했다.[2] 1508년 바디 알자만이 잠복해 있던 아스타라바드 지방이 샤이바니의 공격을 받자,[17] 아제르바이잔 방면으로 도주했다.[18] 이후 페르시아의 이스마일 1세 궁정에 도착하여 타브리즈 주변 토지와 연금을 받았다.[2]
그는 1510년 이스마일 1세가 우즈베크족을 상대로 원정을 감행하도록 영향을 미쳤다. 1512년 몇몇 소규모 국가와의 전쟁에서 패배했다. 바디 알자만은 오스만 제국의 셀림 1세에게 정복될 때까지 타브리즈에 머물렀고,[2] 이후 이스탄불로 가서 1514년 전염병으로 사망했다.[2]
2. 1. 아버지와의 갈등과 화해
1490년대에 바디 알자만과 그의 아버지 후세인 바이카라 사이에 갈등이 시작되었다. 후세인은 바디 알자만을 아스타라바드 총독에서 발흐 총독으로 전출시키고, 그의 아들 무함마드 무민을 아스타라바드 후임으로 임명했다. 이에 분노한 바디 알자만은 반란을 일으켰으나 패배했고, 그의 아들은 처형되었다. 1499년, 바디 알자만은 헤라트를 포위하며 아버지와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이후 후세인과 화해했지만, 긴장 관계는 계속되었다.후세인 바이카라가 살아있을 당시, 바디 알자만은 발흐의 총독을 맡았다.[10] 15세기 말, 북쪽에서 무함마드 샤이바니 칸이 이끄는 우즈베크 (샤이바니 왕조)가 세력을 확장하여 1500년에 사마르칸트, 부하라가 함락되자, 바디 알자만은 아버지로부터 우즈베크 토벌을 명받았다.[11] 1503년 초봄, 바디 알자만은 우즈베크 토벌에 나섰으나, 원군을 받지 못해 발흐로 돌아갔다.[11] 같은 해 샤이바니가 발흐를 공격하자 바디 알자만은 탈출했다.[11] 위기에 처한 바디 알자만은 후세인과 화해하고, 1504년에 무르가브에 병력을 진격시켰다.[12]
2. 2. 티무르 왕조의 쇠퇴와 우즈베크족의 부상
15세기 말, 무함마드 샤이바니가 이끄는 우즈베크족이 중앙아시아에서 세력을 확장하며 티무르 왕조를 위협했다.[11] 1500년에 우즈베크족은 사마르칸트와 부하라를 함락시켰다.[11]1503년 초봄, 발흐의 총독이었던 바디 알자만은 우즈베크족 토벌에 나섰으나, 히사르의 호스로 샤는 바디 알자만에게 공격받을 것을 우려했고, 후세인 바이카라는 바디 알자만에게 불신감을 품고 지원군을 보내지 않아 발흐로 귀환했다.[11] 같은 해, 샤이바니는 발흐를 공격했고, 바디 알자만은 탈출했다.[11] 1504년, 바디 알자만은 후세인과 화해하고 무르가브에 병력을 진격시켰으며, 같은 해 칸다하르를 공격한 바부르의 행동을 견제했지만, 군사적 충돌로 이어지지는 않았다.[12]
1505년에서 1506년 사이 겨울, 후세인 바이카라는 샤이바니에 대한 공격을 결정하고 티무르 왕조의 모든 왕자에게 참전을 요청했다.[13] 1506년 1월, 바디 알자만이 이끄는 연합군 선봉이 무르가브에 도착했으나, 본대를 이끌던 후세인이 위독해져 5월에 사망했다.[14] 후세인 사후, 바디 알자만과 그의 동생 무자파르 후세인의 공동 통치가 결정되었으나[14], 두 군주 사이는 좋지 않았고, 아미르들 사이에서도 권력 다툼이 벌어졌다.[14] 티무르 왕조 군은 샤이바니와의 결전 없이 해산했다.[15]
1507년 5월, 샤이바니는 호라산을 침공했고, 헤라트는 함락되었다. 바디 알자만은 칸다하르로 도주했으나, 1508년에 아스타라바드 지방이 샤이바니의 공격을 받자, 아제르바이잔 방면으로 도주하여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에서 생을 마감했다.[18]
2. 3. 후세인의 죽음과 공동 통치
1505년부터 1506년에 걸쳐 겨울에 후세인 바이카라는 샤이바니에 대한 공격을 결정하고, 티무르 왕조의 모든 왕자에게 참전을 요청했다.[13] 1506년 1월에 바디 알자만이 이끄는 연합군의 선봉은 무르가브에 도착했다. 하지만 본대를 이끄는 후세인이 위독해져, 1506년 5월에 행군 중에 후세인이 사망했다.[14] 후세인의 사후, 본대에 종군했던 아미르 (사령관)들은 바디 알자만과 그의 동생 무자파르 후세인의 공동 통치를 결정했지만[14], 두 군주에 의한 왕권의 공유는 이례적인 일이었다.[13] 바디 알자만과 무자파르 후세인의 사이는 좋지 않았고, 아미르들 사이에서도 권력을 둘러싼 싸움이 시작되었다.[14] 후세인의 사후에도 티무르 왕조 군대는 샤이바니에게 포위된 발흐를 향해 진군을 계속했지만, 샤이바니와의 결전은 이루어지지 않고, 군대는 해산했다.[15]2. 4. 우즈베크족의 헤라트 점령과 망명
1500년 무함마드 샤이바니가 이끄는 우즈베크인 (샤이바니 왕조)이 사마르칸트와 부하라를 함락하자, 바디 알자만은 아버지로부터 우즈베크 토벌을 명받았다.[11] 1503년 초봄, 테르메즈에서 아무다리야 강 우안을 건너 우즈베크 토벌에 나섰으나, 원군 부족으로 발흐로 돌아갔다. 같은 해 샤이바니가 발흐로 진군하자 바디 알자만은 탈출했다.[11] 1504년 무르가브에 병력을 진격시키고, 칸다하르를 공격한 바부르를 견제했으나 군사적 충돌은 없었다.[12]1505년에서 1506년 사이 겨울, 후세인 바이카라가 샤이바니 공격을 결정하고 티무르 왕조의 모든 왕자에게 참전을 요청했다.[13] 1506년 1월 바디 알자만이 이끄는 연합군 선봉이 무르가브에 도착했으나, 본대를 이끌던 후세인이 위독해져 5월에 사망했다.[14] 후세인 사후, 바디 알자만과 그의 동생 무자파르 후세인의 공동 통치가 결정되었으나[14], 두 군주 사이 및 아미르들 간 권력 다툼이 벌어졌다.[14] 티무르 왕조 군은 샤이바니에게 포위된 발흐로 진군을 계속했으나, 샤이바니와의 결전 없이 해산했다.[15]
1507년 5월, 샤이바니의 호라산 침입 시 반격 준비가 되지 않은 티무르 왕조는 막지 못했다.[16] 헤라트 수비대는 우즈베크 선발대에 격파당했고, 샤이바니 본대가 도착했을 때 왕족과 아미르는 이미 탈출한 상태였다. 바디 알자만은 칸다하르로 도주했다.[2] 1508년 바디 알자만이 잠복해 있던 아스타라바드 지방이 샤이바니의 공격을 받자,[17] 아제르바이잔 방면으로 도주했다.[18] 이후 페르시아의 이스마일 1세 궁정에 도착하여 타브리즈 주변 토지와 연금을 받았다.[2]
그는 1510년 이스마일 1세가 우즈베크족을 상대로 원정을 감행하도록 영향을 미쳤다. 1512년 몇몇 소규모 국가와의 전쟁에서 패배했다. 바디 알자만은 오스만 제국의 셀림 1세에게 정복될 때까지 타브리즈에 머물렀고,[2] 이후 이스탄불로 가서 1514년 전염병으로 사망했다.[2]
3. 가족 관계
바디 알자만은 다섯 명의 배우자를 두었다.
- 우룬 술탄 하눔: 아부 사이드 미르자 술탄과 루카이야 술탄 베굼의 딸로, 알라 알-다울라 미르자 빈 바이숭구르 빈 샤 루크의 딸이었다.
- 카불리 베굼 (1507년 이혼): 울루그 베그 미르자 2세의 딸로, 1507년 캄바르 미르자 쿠칼타쉬와 결혼했다.
- 루카이야 아가: 안달립으로 알려진 첩으로, 1507년 무함마드 셰이바니의 아들 티무르 술탄 우즈벡과 결혼했다.
- 추착 베굼 (1498년 결혼): 춘 눈 아르군, 샤 슈자, 무함마드 무킴의 누이의 딸이다.
- 타함탄 베그의 딸: 아사드 베그의 조카이자 무함마드 자만 미르자의 어머니.
바디 알자만은 두 아들을 두었다.
- 무함마드 무민 미르자 - 우룬 술탄 하눔과 사이에서 태어남
- 무함마드 자만 미르자 - 타함탄 베그의 딸과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바부르 황제의 딸 마수마 술탄 베굼과 결혼했다.
바디 알자만은 한 딸을 두었다.
- 추착 베굼 (쿠체크 베굼으로 알려짐, 1507년 4월 사망) - 추착 베굼과 사이에서 태어남
3. 1. 배우자
바디 알자만은 다섯 명의 배우자를 두었다.- 우룬 술탄 하눔: 아부 사이드 미르자 술탄과 루카이야 술탄 베굼의 딸로, 알라 알-다울라 미르자 빈 바이숭구르 빈 샤 루크의 딸이었다.
- 카불리 베굼 (1507년 이혼): 울루그 베그 미르자 2세의 딸로, 1507년 캄바르 미르자 쿠칼타쉬와 결혼했다.
- 루카이야 아가: 안달립으로 알려진 첩으로, 1507년 무함마드 셰이바니의 아들 티무르 술탄 우즈벡과 결혼했다.
- 추착 베굼 (1498년 결혼): 춘 눈 아르군, 샤 슈자, 무함마드 무킴의 누이의 딸이다.
- 타함탄 베그의 딸: 아사드 베그의 조카이자 무함마드 자만 미르자의 어머니.
3. 2. 아들
바디 알자만은 두 아들을 두었다.- 무함마드 무민 미르자 - 우룬 술탄 하눔과 사이에서 태어남
- 무함마드 자만 미르자 - 타함탄 베그의 딸과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바부르 황제의 딸 마수마 술탄 베굼과 결혼했다.
3. 3. 딸
바디 알자만은 한 딸을 두었다. 추착 베굼과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쿠체크 베굼으로 알려졌다. 1507년 4월 사망했다.4. 가계도
템플릿은 허용되지 않는 문법이므로 제거하고, 내용을 풀어서 작성해야 한다. 가계도는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므로, 바디 알자만을 중심으로 그의 조상을 나열하는 방식으로 서술한다.
'''바디 알자만 미르자'''의 가계도는 다음과 같다.[7][8]
- 아버지: 술탄 후세인 미르자 바이카라
- 어머니: 베가 술탄 베굼
- 할아버지(부): 기야스 우드-딘 만수르 미르자
- 할머니(부): 피루자 술탄 베굼
- 할아버지(모): 산자르 미르자
- 할머니(모): 바크트 술탄
기야스 우드-딘 만수르 미르자의 아버지는 무함마드 바이카라 1세이며, 어머니는 쿠틀루그 술탄 베굼이다. 무함마드 바이카라 1세의 아버지는 술탄 후세인 타이치우드이며, 어머니는 쿠틀루그 술탄 베굼이다. 술탄 후세인 타이치우드의 아버지는 아흐마드 미르자이며, 어머니는 타지 알-물크이다.
산자르 미르자의 아버지는 우마르 셰이크 미르자 1세이며, 어머니는 말리캇 아가이다. 우마르 셰이크 미르자 1세의 아버지는 엘지게데이 부족의 알리이며, 어머니는 카탈라니의 비비 파티마이다. 말리캇 아가의 아버지는 타이치우드의 아미르 무함마드 베그이며, 어머니는 아카 베굼이다. 아미르 무함마드 베그의 아버지는 미란 샤이며, 어머니는 서부 차카타이 칸국의 우룬 술탄 카눔이다.
우마르 셰이크 미르자 1세는 바디 알자만 미르자의 조상 대에서 두 번 나타난다. 즉, 바디 알자만 미르자의 가계는 우마르 셰이크 미르자 1세와 말리캇 아가에서 비롯된 두 갈래가 합쳐진 것이다.
5. 참고 서적
- Svatopluk Soucek영어. ''A History of Inner Asia''.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
참조
[1]
서적
'Svatopluk Soucek. A History of Inner Asia'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
서적
"The history of Persia. Containing, the lives and memorable actions of its kings from the first erecting of that monarchy to this time; an exact Description of all its Dominions; a curious Account of India, China, Tartary, Kermon, Arabia, Nixabur, and the Islands of Ceylon and Timor; as also of all Cities occasionally mention'd, as Schiras, Samarkand, Bokara, &c. Manners and Customs of those People, Persian Worshippers of Fire; Plants, Beasts, Product, and Trade. With many instructive and pleasant digressions, being remarkable Stories or Passages, occasionally occurring, as Strange Burials; Burning of the Dead; Liquors of several Countries; Hunting; Fishing; Practice of Physick; famous Physicians in the East; Actions of Tamerlan, &c. To which is added, an abridgment of the lives of the kings of Harmuz, or Ormuz. The Persian history written in Arabick, by Mirkond, a famous Eastern Author that of Ormuz, by Torunxa, King of that Island, both of them translated into Spanish, by Antony Teixeira, who liv'd several Years in Persia and India; and now render'd into English."
[3]
서적
Imperial Identity in Mughal Empire: Memory and Dynastic politics in Early Modern Central Asia
I. B. Tauris
2012-01-15
[4]
서적
The Baburnam in English (Memoirs of Babur) - Volume 1
Luzac & Co., London
[5]
서적
Sindh under the Mughals: An Introduction to, translation of and commentary on the Mazhar-i Shahjahani of Yusuf Mirak (1044/1634)
[6]
서적
The Baburnama: Memoirs of Babur, prince and emperor
https://archive.org/[...]
Random House Publishing Group
2002-09-10
[7]
서적
Timurids in Transition: Turko-Persian Politics and Acculturation in Medieval Iran, Volume 7
https://books.google[...]
BRILL
2013-01-13
[8]
서적
The Timurid Dynasty
[9]
서적
ムガル皇帝歴代誌
創元社
[10]
간행물
チムール以降のウズベキスタン史
[11]
간행물
チムール以降のウズベキスタン史
[12]
간행물
チムール以降のウズベキスタン史
[13]
서적
バーブル
山川出版社
[14]
간행물
チムール以降のウズベキスタン史
[15]
간행물
チムール以降のウズベキスタン史
[16]
간행물
チムール以降のウズベキスタン史
[17]
간행물
チムール以降のウズベキスタン史
[18]
간행물
チムール以降のウズベキスタン史
[19]
서적
バーブル・ナーマの研究
松香堂
[20]
서적
A History of Inner Asia
[21]
문서
이 이후의 티무르 왕조의 역사에 대해서는 [[무굴 제국]]을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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